로마시대의 스포츠 문화

로마시대의 스포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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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의 스포츠와 오락


로마시대 스포츠의 유래


로마시대에는 소아시아(Asia Minor)로부터 이동해온 에트루리아인(Etruricans)들이 이탈리아의 중서부 지방으로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으며, 그러한 배경으로 로마의 신체에 대한 철학, 놀이, 게임, 스포츠 등은 에트루리아인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경주, 멀리뛰기, 투원반, 레슬링, 권투, 수영, 투창, 전차경주 등을 즐겼다. 귀족들은 축제의 연회에서 사망한 전사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죄수들을 이용한 격투 스포츠(combative sport)나 동물을 이용한 유혈 격투 스포츠의 관람도 즐겼으며, 검투사 경기, 전차경주, 동물이나 죄수를 이용한 유혈의 격투 등과 같은 로마의 스포츠문화는 에트루리아인들의 신체 문화유산이 계승된 것이었다.

 

로마시대 관중 스포츠와 오락


로마시대 스포츠의 성격과 기능


전차경주나 검투사(gladiator)들의 격투 등은 대중을 현혹하던 소위 그레꼬-로만 쇼였다. 공화정 후기와 제정시대의 정치인들은 원형연무장이나 원형경기장의 쇼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정치가들은 그들의 지지를 위해 시민들에게 각종 비천한 유혈 스포츠를 여흥거리로 제공했다. 지배계급은 시민의 혁명을 두려워한 나머지 대중에게 여흥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운(運)을 계속 이어가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로마의 스포츠는 현대적 의미로 해석할 때 탈 정치화의 수단으로 볼 수 있다.

각종 스포츠와 오락


로마의 사적, 공적인 각종 게임들은 주로 '원형경기장(Circus)'에서 열렸다. 대표적인 원형경기장은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Circo Massimo)였다. 치르코 막시모는 전차경주장으로 약 6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기원전 200년 이후 키르쿠스 플래미니우스(Circus Flaminius, 221 BC)를 비롯하여 더 많은 경기장이 건립되었다. 대표적인 경기는 전차경주였고, 이 경주는 곡선 주로를 돌 때 큰 위험을 동반했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이 생겨났다.

원형경기장과 함께 로마의 스포츠와 오락이 행하여진 곳은 원형연무장(amphitheater)이었다. 원형연무장의 가장 대표적인 쇼(shows)는 검투사가 호랑이, 사자 등을 상대로 싸우는 야수사냥(venationes)이었다. 그러나 후기로 와서 야수사냥은 인간과 인간의 격투로 변하였다. 대표적인 원형연무장은 콜로세움(Colosseum)이었고, 그 곳에서 열린 가장 자극적인 관중 스포츠는 '검투사의 격투(gladiatorial combat)'였다.

검투사 경기는 원래 장례경기에 기원을 둔 것으로 에트루리아인을 통해 로마로 전해진 것이 관중들의 여흥거리로 변질되었다.

관중 스포츠 외에 로마시대의 사회상을 대변하는 것 중 하나가 목욕문화였다. 후기 로마 사회에는 많은 공중목욕탕(public baths)이 생겼으며, 그것을 테르마에(Thermae)라고 불렀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티투스(Titus), 카라칼라(Caracalla) 등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피지배지에도 대형 목욕탕을 건립했으며, 봄베이 (Pompeii)시의 테르마에는 오늘날까지도 보존되고 있고,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영국 바스(Baths)에도 로마의 목욕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다.

 

로마시대의 올림픽


로마는 서기 86년 그리스 침략 때 대부분의 그리스 성지를 파괴해버렸다. 역사가 파우사니아스(Pausanias)가 올림피아를 방문한 것은 서기 174년이었다. 그 때까지 헤라 신전과 각 보물 창고에는 고가의 봉납품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3세기에 들어 도시가 재정적으로 어려워졌고, 선수들은 훈련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부패로 인해 올림픽에 대한 관심도 약화되었다. 로마 지배 이후 이집트, 페니키아, 아르메니아 등 여러 국가의 선수들이 출전하는 등 명맥은 유지되었으나 3세기 중반 제우스 신전을 비롯한 많은 신들의 성역이 파괴되면서 고대 올림픽은 종말을 향하고 있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도(異敎徒的)인 모든 것을 금지한 다음 해인 서기 393년 고대 올림픽은 293회 대회를 끝으로 종말을 맞았다.

 

로마스대의 체육사상


기독교 사상과 오락적 스포츠


로마시대 기독교의 성장은 체육과 스포츠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가 확산되어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종교계의 지도자들은 로마의 비천한 유혈 스포츠를 저주하였다.23) 로마 교회에서 스포츠를 금기시한 가장 큰 이유는 스포츠가 다른 신들을 숭상하던 관습과 관련된 이교도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각종 운동경기는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거나 다른 신(神), 즉 이교(異敎)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발달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된 로마 사회에서 올림픽을 지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체육사상


갈렌


갈렌(Claudius Galen, 130~200 AD)은 17세 때부터 의학을 공부했고, 치료술을 익힌 당대 유명한 의사였다. 그는 건강한 시민의 육성을 중요시했으며,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영웅으로 추앙받는 직업적인 운동선수(professional athletes)의 활동에는 반대하였다. 그는 저서 《직업 선택에 관한 권고》에서 로마의 직업적인 운동선수들을 비판하며, 과도한 운동, 과식, 돼지와도 같은 지나친 수면 등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운동선수들은 결코 건강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건강을 위해 레슬링, 판크라티온, 달리기, 권투, 체조 등과 같은 운동은 권장하였다.

유베날리스


유베날리스(Decimus Junius Juvenalis)는 기원전 2세기경 많은 풍자시를 남겼던 인물로 지배 계급의 사치스러운 생활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16권의 풍자시를 남겼는데, 제10권에 등장하는 말 때문에 그가 체육사에 남게 되었다. 그의 풍자시 10권에, 인간은 소원이 있으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기원만 할 것이 아니라 뭔가를 기원한다면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있기를 기원해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그의 작품은 세상에 대한 풍자였고, 혼탁해진 사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런데 영국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 1632~1704)가 <교유론(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 1693)》의 책머리에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있다(A Sound mind in a Sound body)”라는 유베날리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널리 확산되어 오늘날까지 체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캐치프레이즈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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