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반영해주는 거울

축구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반영해주는 거울

축구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반영해주는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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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반영해주는 거울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축구는 잡다한 사회문제들과 아무런 연관 없이 존재하는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축구는 막대한 경제적 이해관계와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정략이 개입되는 장소로서 존재한다. 축구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반영해 주는 거울이다.

 

협회들의 관리를 맡은 유력 인사들


최초의 선수들은 자신들이 직접 협회 관련 사무를 수행했다. 그후 축구화를 벗은 제1세대 선수들이 클럽에 남아 사무를 보게 되면서 본격적인 팀 관리자가 탄생했다. 실업가들은 스포츠 정신과 팀의 명성을 기업 경영에 이용하기 위해 직접적인 투자를 했다.

이제 축구 클럽 위원회 안에 존재하는 서열구조는 클럽 자체를 포함하는 사회구조 자체의 서열구조와 정확히 일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작용하는 총체적 변천에 발맞추어 변화해 나갔다. 1920년을 전후해서만 해도 상당한 고위직을 점하고 있던 교사들은 이제 소규모 사업주들과 자유직업인들에게 밀려 보다 하급 지위로 떨어지거나 완전히 도태되었다.

1930년대부터 대도시 축구 클럽의 관리는 사업가나 대규모 도매상인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의사나 보험회사 간부 같은 자유업 종사자들은 제2선으로 물러났다. 모두 축구를 사랑한이들이었지만 저마다 할일이 있었던 것이다. 보다 하급의 실무들은 고용인이나 육체노동자가 맡았다.

오늘날, 유럽의 대규모 클럽들의 지도부에는 실업계의 거물들과 다국적 기업들(아인트호벤의 필립스, 튜린유벤투스의 피아트)이 군림하고 있다.

 

스타디움 건설에 대한 열정


축구에 후원자들이 개입한 것은 유력인사들의 경기장 양도를 통해서였다. 프랑스 북부와 보주 지방의 섬유사업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독일에서는 겔젠키르히엔의 한 기업이 샬케04 클럽에게 기업 소유 경기장 중 하나를 99년 후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양도했다. 1928년, 클럽은 4만 명의 관객을 수용하는 스타디움을 건설했다. 기업가들의 뒤를 이어 경기장 부지를 내준 것은 자치단체들이었다.

축구와 기업을 효과적으로 엮어 전례 없는 상승효과를 이끌어냈다. 통신 사업가로서 정계에 입문한 베를루스코니는, 텔레비전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해 A.C.밀란의 이미지와 수익성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국제경기 참가 횟수에 비례해 늘어난 스폰서, 텔레비전 중계에 따른 판권 수입, 통신 가입자수의 증가로 A.C. 밀란은 막강해졌다. 이 클럽은 1989년에서 1994년 사이에 국가 선수권에서 다섯 차례, 클럽 챔피언전에서 두 차례, 대륙간컵에서 두 차례 우승했다.

이처럼 축구는 광대한 부동산을 소유하기 시작했다. 좁은 국토를 지니고 있는 스위스만 보아도 이미 1951년에 경작 가능한 평지에 400개가 넘는 스타디움을 지니고 있었다. 대규모 관중석을 갖춘 스타디움 건설에 대한 열정은 라틴 아메리카에도 휘몰아쳤다. 1924년의 올림픽을 위해 건설된 콜롱브의 스타디움은 당시 4만 5천밖에 수용하지 못했지만 우루과이 월드컵의 결승전은 10만명을 수용하는 신설 경기장에서 펼쳐졌다. 브라질은 이를 능가했다. 20만의 관중석을 지닌 리오의 마라카나 스타디움은 글래스고와 런던의 초대형 경기장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거대화의 시기가 지나자 쾌적한 설비, 특히 지붕이 덮인 관중석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런 경기장이 건설되면서 관중들은 예전에는 맛보지 못한 쾌적함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옛날의 관중들이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견뎌내야 했는지! 서부 유럽에서는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규제에 부응하여 신축 스타디움의 관중석을 모두 좌석으로 메웠다. 카이로(13만 석), 라고스 (7만석), 알제 (8만석) 등 아프리카의 대지에서도 근대성을 상징하는 축구의 성소들이 솟아올랐다.

 

카톨릭 축구와 노동자 축구


세기 전환기, 젊은이들의 교육을 소명으로 삼는 기관들은 예외없이 축구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카톨릭 교회가 축구를 장려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1900년 이후, '프랑스 체육 운동경기 선도 연맹(F.G.S.P.F..Fédération de Gymnastique et Sportive des Patronages de France)'은 자체의 대항전을 창설했다. 덕성과 신앙심의 교육장이 되고자 했던 선도회의 팀들은 애타주의와 박애주의를 가르쳤다.

1905년 프랑스에서는, 교회와 정부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면서 F.G.S.P.F.와 U.S.F.S.A. (프랑스 스포츠 · 운동 단체 연맹)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가 종말을 고했다. F.I.F.A.의 인정을 받은 유일한 단체였던 U.S.F.S.A.는 카톨릭계의 경쟁상대인 F.G.S.P.F.로부터 외국 팀과 경기를 치를 수 있는 권한을 완전히 박탈했다.

또 하나의 연맹, 세속 학교 졸업생들의 협회(petites A)도 카톨릭 축구와 대립했다. 이를 통해 세기 초의 프랑스 축구에 미친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알 수 있다. 많은 선도 팀들은 1919년의 F.F.F.A.와 신설 카톨릭 연맹에 가입했다. 1955년, 카톨릭 선수들의 수는 6만 5천에 달했다. F.G.S.P.F.는 축구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 뒤를 이은 노동자 축구 역시 자체적인 연맹들의 내부에서 발전했다. 연맹들은 노동당, 노동조합과 더불어 노동운동의 세 축을 구성했다. 그 본보기가 된 것은 세기 말엽의 오스트리아와 독일이었다. 프랑스는 1905년경에야 이러한 동향을 뒤따랐다.

독일에서 노동자 축구 선수로 활약한 이는 1920년에 5만명, 1930년에는 14만 명에 이르렀다. 함부르크나 베를린과 마찬가지로 작센 지방의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에도 훌륭한 팀들이 즐비했다. 드레스덴의 팀은 노동자 계급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1924년 파리에서 원정경기를 가졌다.

프랑스의 노동자 축구는 독일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소박한 형태로 머물러 있었다. 노동자 축구는 주로 북프랑스와 파리 지역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꾸려 나가던 노동자 축구는 1933년 이후에 독일에서마저 쇠퇴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축구는 민중민주주의의 새로운 형태로밖에 취급되지 않았다. 스파르타키아드는 노동자 축구에 국제 경기의 기회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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