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1948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스위츠)

제5회 1948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스위츠)

제5회 1948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스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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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제5회 동계올림픽이 1948년 1월 30일 ~ 2월 8일까지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개최되었다.  스웨덴 출신의 시그프리드 에드스트롬(Sigfrid Edström)이 벨기에 바이에ㅡ라투르의 뒤를 이어 IOC 위원장이 되었다. 프랑스 국가올림픽위원장은 1936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르망 마사르였다.

생- 모리츠에는 28개 나라를 대표하는 669명(남 592 여 )의 선수가 모였다. 스위스 연방 대통령 엔리코 첼리오(Enrico Celio)가 대회 개회선언을 하고, 하키선수인 리카르도 토리아니(Riccardo Tomiani)가 선서했다. 10일 간의 경쟁을 통해 5개 스포츠 22개 종목의 경기가 벌어지고, 59,000명의 관중 앞에서 68개의 메달이 주어졌다.

1946년 9월 6일, IOC는 스위스 로잔에서 '앙가 지방의 진주'로 불리는 생모리츠에서 1948년 제5회 동계올림픽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올림픽경기 자체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생모리츠가 이미 1928년 제2회 동계올림픽경기를 개최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행사에 필요한 기반시설과 경험을 가졌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대회 개막식 날, 전 세계는 인도의 지도자인 네루 간디가 힌두교 광신자에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국가 수는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대회와 같지만, 내용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즉 지난 대회의 개최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서 이번 대회에 초청을 받지 못한 대신 대한민국과 덴마크가 처음으로 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전후에 처음으로 열리는 이 대회는 알파인스키가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이 좋아하는 노르딕스키를 제치고 가장 인기있는 경기로 등극하는 기회였다. 이와 함께 미국의 한 텔레비전 채널이 처음으로 경기를 중계방송 했다. 이를 위해 매일 취리히와 뉴욕을 잇는 특별 전세기가 운행되었다.

이번에는 생-모리츠에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왔지만, 불행하게도 경기 마지막 날인 2월 8일 아이스하키 경기장에서 격렬한 언쟁이 벌어져 대회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문제의 발단은 미국에서 온 두 팀이 경기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팀인 AAU(Amateur Athletic Union) 팀이 국가올림픽위원회에 등록하지 않은 채 경기에 참가하려고 했고, IOC는 AAU가 경기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했다. 두 번째 팀인 AHA(Amateur Hockey As~sociation)팀은 국제아이스하키리그에 등록한 팀으로, 스위스 국가올림픽조직위원회가 참가신청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IOC는 발끈하여 미국 팀이 경기에 참가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당장 IOC와 국제아이스하키리그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IOC는 대회 진행을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AHA가 시합에 참가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거기에다 미국 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이며 차기 IOC 위원장이 될 에이버리 브린디지는 아마추어 정신을 존중하여 다른 팀을 지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 팀은 극심하게 맞섰다. 결국 AHA는 실격 판정을 받아 팀이 차지한 4위 자리를 내놓았다. IOC와 국제아이스하키리그 사이의 다툼은 더욱 악화되어 1949년 2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32회 총회에서 IOC는 하키리그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양측이 다시 화해하기 위해서는 1952년 오파티야(Opatija)에서 열린 제35회 총회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하키경기는 진행되어 캐나다 팀이 체코슬로바키아와 스위스를 누르고 다섯 번째로 올림픽 챔피언이 되었다.

1924년 동계올림픽경기가 생겨난 이후로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은 그들 나라의 국민스포츠인 노르딕스키에서 언제나 빛을 발해 왔다. 스웨덴은 1932년 우터스트림(Ulterstromm), 1936년 라르손(Larsson)이 우승한 18km 올림픽 타이틀을 지켜내는 위업을 이루었다. 이 같은 성과는 스웨덴과 같은 나라에는 예사로운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19481년에 세 명의 스웨덴 선수가 동시에 시상대에 오른 것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1위 자리에 룬드스트림(Lundström), 2위 스텐손(Östensson), 3위 에릭손(Eriksson)이 나란히 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미 1936년 그들은 50km 경기를 석권했다. 이번에는 1, 2위를 차지하여 실력과시를 되풀이했다. 우승을 차지한 카를손(Karlsson)과 2위를 차지한 에릭손 덕분이었다. 특히 카를손은 명성 높은 고스타올란더(Gosta Olander)의 문하생이었다. 스웨덴의 위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4*10km 계주 경기에서 외스텐손, 타프(Tapp), 에릭손 그리고 룬드스트룀이 2시간 32분 8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냈기 때문이다. 룬드스트룀은 두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계주 2위를 차지한 핀란드는 2시간 41분 6초를 기록해서 9분이 넘는 차이를 보였다.

이번 생-모리츠 대회에서 처음으로 참가선수 숫자에서 알파인스키에 밀려 노르딕스키가 2선으로 물러났다. 알파인스키에 알파인 복합, 회전 그리고 활강 등 3개의 메달이 수여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전 대회와는 달리, 프랑스 팀은 앙리 오레이에(Henri Oreiller)와 특히 1938년 활강 세계챔피언인 제임스 쿠테(James Coultel)를 앞세워 알파인스키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2월 2일 피츠내 코스에서 등번호 9번을 단 23세의 앙리오레이에가 활강경기를 출발했다. 그는 스피드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제임스 쿠테에 비교할 때 그의 경기 스타일이 많은 관심을 끌었다. 출발과 동시에 균형이 약간 흔들렸지만, 그는 한 쪽 다리에 체중을 실어 스키를 탔다. 매번 넘어질 것 같았지만 엄청난 위험을 무릅쓴 결과 시속 77km가 넘는 속도로 처음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위인 오스트리아 프란츠 가블(Franz Gabl)은 4초 1/10이 더 늦은 기록으로 경기를 끝냈다. 두 명의 스위스 선수 몰리토르(Molitor)와 올링거(Olinger)가 동률로 3위 자리에 올랐다. 13위에 그친 쿠테는 실망이 컸다.

회전 경기에서는 5명의 프랑스 선수가 출발선에 섰다. 불운한 쿠테, 활강 우승을 차지한 오레이에라크루아(Lacroix), 펜즈(Penz) 그리고 드 위에르타(de Huertas)가 그들이다. 앞 두 명은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하는 데에 성공한다. 스위스 선수 라이날터(Reinalter)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마치 날개를 단 듯하여 쿠테에 0.5초를 앞서 우승을 차지했다. 2월 4일에는 알파인복합 마지막 경기인 회전경기가 열렸고, 쿠테가 1위를 차지했다. 이승리 덕분에 그는 우승자인 오레이와 2위 스위스 선수 몰리토르에 이어 3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로 복합경기는 동계대회에서 제외되었다 1988년 캘거리 대회에서 다시 등장했다. 앙리 오레이에는 대회 역사상 활강경기에서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건 스키선수에다 금메달 2개 동메달 하나를 따서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선수이다. 그는 2년 뒤에 알파인스키를 그만두고 또 다른 열정을 자동차경주에 쏟아 1959년에는 랠리경주의 프랑스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1962년 몽틀레리에서 벌어진 살롱컵 대회에서 경주차가 트랙을 벗어나는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전후시대를 맞아 동계올림픽대회에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했다. 2월 6일, 이미 여자 피겨스케이팅 세계챔피언 자리에 오른 바바라 앤스콧(Barbara Ann Scott)이라는 젊은 여자선수가 동계올림픽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19세의 이 젊은 캐나다 출신의 선수는 잊지 못할 소냐 헤니를 생각나게 했다. 그녀는 소냐가 착용했던 것과 같은 차림을 하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동작으로 우아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안정감이 돋보이는 연기를 펼쳤다. 그녀는 모든 경쟁자들을 쉽사리 제압하여 오스트리아 선수 에바 파블리크(Eva Pavlick), 영국 선수 자네트 알트웨그(Jeannette Allwegg)에 앞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 두 명은 1952년에 다시 만나게 된다. 세계 챔피언과 올림픽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이 캐나다 선수는 마치 소냐 헤니와 같이 화려한 장래와 많은 부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두번째로 여자개인 세계챔피언이 된 이후로는 피겨스케이팅 경기장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또 다시 노르웨이가 금 4, 은 3. 동 3 모두 10개의 메달을 따내 스웨덴과 동률로 종합성적 1위에 올랐다. 이번 생모리츠 올림픽대회는 알파인스키를 위한 대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알파인스키 덕분에 프랑스는 종합성적 5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번 대회의 스타선수는 알파인스키에서 금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목에 건 앙리 오레이에였다.

생- 모리츠에서 두 번째로 열린 이 대회는 동계올림픽경기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알파인스키가 노르딕스키를 제치고 최고의 경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이번 대회에서 경험한 '스위스식' 경기운영에 아주 좋은 기억을 갖게 되었다. 단지 미국 아이스하키 팀 때문에 야기된 IOC와 스위스 국가올림픽위원회 사이에 마찰이 생긴 것이 오점이었다.

이 대회에서 리차드 버튼(Richard Button)과 같은 새로운 챔피언이 탄생하는 것과 함께 올림픽의 역사를 장식한 대단한 선수들이 고별경기를 벌이는 것도 지켜볼 수 있었다. 노르웨이 선수인 비르이르 루드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생모리츠에서 비르이르 루드는 중간도약대 특별점프에서 은메달을 땄다. 12년 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그는 알파인스키와 노르딕스키에서 각각 하나씩 두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노르딕스키가 관심을 좀 잃긴 했지만,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은 이 종목에서 모든 메달을 석권함으로써 그들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 종목의 15개 메달 가운데 스웨덴은 금메달 3개를 포함해 7개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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